[예술과 목회]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과 세상의 빛을 거부하는 세상
[예술과 목회]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과 세상의 빛을 거부하는 세상
  • 신사빈 박사
  • 승인 2024.04.16 10: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윌리엄 홀먼 헌트 〈세상의 빛〉, 1851년 옥스퍼드 케블(Keble) 칼리지 예배당 소장.
윌리엄 홀먼 헌트 〈세상의 빛〉, 1851년 옥스퍼드 케블(Keble) 칼리지 예배당 소장.

영국 라파엘전파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William Holman Hunt, 1827-1910)의 <세상의 빛>은 19세기 영국 종교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온 작품이다. “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며 탄생한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는 19세기까지 수많은 추종자를 낳으며 이상적이고 완벽한 비례를 강조한 고전주의 미술의 대명사 라파엘로를 거부했고 오히려 기술적으로는 미숙하지만 라파엘로 이전에 중세풍의 미술에서 더욱 정신적이고 순수한 미술의 선례를 발견하고자 했다. 이 화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과 물질화된 인간의 정신 세계를 예술을 통해 회복하고자 했고, 이 이념으로 라파엘전파 화가들은 내용적인 면에서나 양식적인 면에서 매우 참신하고 뜻이 풍부한 새로운 종교적 도상들을 산출했다. 라파엘전파의 창립 멤버였던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중세 필사본화처럼 화면을 가득 채운 구성으로 그려진 그리스도의 전신상이 보인다. 아카데미즘에서 선호하는 고전적 양식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등불은 세상의 빛으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존재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 미술에는 없는 이 새로운 그리스도 도상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묘사된 묵시록의 그리스도이다.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이 말씀이 그림의 틀에 새겨져 있다. 달빛이 은은하게 번지는 고즈넉한 밤에 누군가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양손의 못 자국은 부활한 예수임을 암시하고 있고, 천국의 복장은 성스럽고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신으로 누군가의 집 앞에 서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문에 손잡이가 없다. 안에서 열어야만 열리는 문이다. 또한 무성하게 자란 수풀이 문 전체를 뒤덮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마나 오래 이 집 앞에 서 계셨던 것일까? 그리스도의 얼굴이 왠지 슬퍼 보이고 고요히 밤을 밝히는 둥근 달만이 그리스도의 오랜 기다림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헌트는 기존의 도상학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당시 영국 성공회 교회에서 일어났던 교회갱신 운동의 요구를 수용하여 독창적인 도상을 산출하고 있다. 고교회(High Church) 운동과 저교회(Low Church) 운동이 그것인데 전자는 사제복이나 미사 등의 가톨릭적 요소를 부활시켜 영적인 삶과 교회의 신비한 분위기를 되찾고자 했고, 후자는 성경을 우선하는 복음주의를 더욱 강조하며 시각적 요소보다는 언어적인 면을 더 선호하려 했다. 헌트는 화가의 사명을 목사의 사명과 유사하게 보며 교회 쇄신 운동의 요구들을 그림에 모두 수용했다. 그리스도가 착용한 천국의 복장은 가톨릭적 요소이고 묵시록의 성경 구절을 스스로 발췌하고 시각적으로 해석한 것은 복음주의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자연을 진실되게 그리는 것이 신의 손길을 따르는 것이라는 러스킨의 사상을 성실하게 반영하여 자연의 달이 마치 그리스도의 초월적 후광(nimbus)처럼 보이게 한 것은 자연의 묘사를 통해 종교적 숭고함에 이르고자 한 낭만주의 미학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상의 빛>은 헌트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당시 영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기독교 종교에 대한 회의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종은 산업혁명으로 피폐해진 당시 영국 사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어느새 디지털 혁명의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기술 문명에 더욱 사로잡혀 실존의 모습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저쪽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인간은 죄의 실존에서 점차 존재로 나아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친절하게도 저 멀리서 부르는 대신 바로 너와 나의 집 앞에 서 계신다. 그리고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계신다. 화가는 오랜 세월 닫혀있는 문을 통해 세상의 빛을 거부하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세상의 빛>은 당시 대중들의 커다란 호응을 얻으며 판화로 대량 보급되었고 스테인드글라스나 제단화로도 제작되며 영국 프로테스탄티즘을 시각화한 가장 영국적인 종교화, 프로테스탄티즘 성상(Icon of Protestantism)이라는 공식 칭호를 얻게 된다.

신사빈 박사<br>이화여자대학교 <br>『미술사의 신학』 저자<br>예목원 연구위원
신사빈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의 신학』 저자
예목원 연구위원

 

 

가스펠투데이의 뉴스를 받아보세요!
    Array ( [0] => Array ( [0] => band [1] => 네이버밴드 [2] => checked [3] => checked ) [1] => Array ( [0] => talk [1] => 카카오톡 [2] => checked [3] => checked ) [2] => Array ( [0] => facebook [1] => 페이스북 [2] => checked [3] => checked ) [3] => Array ( [0] => story [1] => 카카오스토리 [2] => checked [3] => checked ) [4] => Array ( [0] => twitter [1] => 트위터 [2] => checked [3] => ) [5] => Array ( [0] => google [1] => 구글+ [2] => checked [3] => ) [6] => Array ( [0] => blog [1] => 네이버블로그 [2] => checked [3] => ) [7] => Array ( [0] => pholar [1] => 네이버폴라 [2] => checked [3] => ) [8] => Array ( [0] => pinterest [1] => 핀터레스트 [2] => checked [3] => ) [9] => Array ( [0] => http [1] => URL복사 [2] => checked [3] => )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제동 298-4 삼우빌딩 402호
  • 대표전화 : 02-742-7447
  • 팩스 : 02-743-744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최상현
  • 대표 이메일 : gospeltoday@daum.net
  • 명칭 : 가스펠투데이
  • 제호 : 가스펠투데이
  • 등록번호 : 서울 아 04929
  • 등록일 : 2018-1-11
  • 발행일 : 2018-2-5
  • 발행인 : 채영남
  • 편집인 : 박진석
  • 편집국장 : 류명
  • 가스펠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가스펠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ospeltoday@daum.net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