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준 목사의 말씀 산책 (1)]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이상준 목사의 말씀 산책 (1)]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
  • 이상준 목사
  • 승인 2024.06.1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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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6:6-8

이렇게 다시 모여서 회중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격적이고 감사한가! 한국의 상황이 많이 진정됐지만 전 세계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고 완전히 극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2월 25일 공예배를 멈추고 온라인예배로 전환한지 딱 두 달 만이다. 그동안 공예배를 드리지 못하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일까?” 질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악행을 올스톱(all-stop)! 다 멈추게 하신 상황이 아닌가 싶다. 세상이 너무나 많은 악한 일들을 계획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니까 바벨탑 같은 사건을 일으키신 게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정직해야 한다. 세상의 악행만을 멈추게 하신 것인가? 교회의 악행도 멈추게 하신 것이 아닌가! 전세계 모든 교회의 모든 공예배가 멈추게 되지 않았는가. 만약 이사야 선지자가 외친 것처럼, “내가 언제 너희에게 짐승의 피와 기름을 요구했느냐.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너희가 예배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말씀하신 것이라면 말이다.

(말1:10중)“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만약에 이것이 이 시대 교회들을 향한 하나님의 동일한 음성이라면! 예배를 재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겠가! 어떻게 예배해야 진정 하나님이 받으실 수 있는 예배가 될까 오늘 말씀을 묵상하기 원한다.

(6절)“내가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미가 선지자는 아하스 왕 때 예언했던 인물이다. 그는 모레셋이라는 수도 예루살렘에서 40-50km 떨어진 아주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었다. 하지만 나라의 심장인 예루살렘을 향하여서 피를 토하는 예언의 말씀을 외쳤다. 이유는 너무나 남유다의 영적 현실이 밑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미가 선지자의 상황은 지금 우리 시대의 상황과 같은 것이었다.

아하스 왕은 20세에 남유다의 12대왕에 즉위하자마자 우상숭배에 열을 올리다가 아람 군대에게 두들겨 맞아야 했다. 게다가 군사지원을 해준 앗수르 왕을 만나러 갔다가 다메섹 신전의 제단에 감동을 받아서 그것을 그대로 본따 예루살렘 성전에 모셔놓고 본격적으로 우상숭배에 열중했다. 그야말로 영적으로 암울한 시대였다. 이렇게 무너진 시대에는 개인이 아무리 열심을 내도 영적 침체를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면 신앙은 개인적 차원도 있지만 공동체적인 차원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개인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살아나야 할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시대를 보라. 우리는 최첨단의 문명을 누리고 있지만 극도의 물질만능과 기계 문명에 취해 있지 않은가. 사상적으로는 다원주의와 무신론이 팽배해 있지 않은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시대의 영적 기상도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끼어 있다. 정말 우리 자녀들의 시대가 걱정이다. 첨단 문명이라 좋겠다가 아니라, 기후변화, 쓰나미, 전염병은 갈수록 심화될 것이고, 무신론과 이단사이비의 영향력은 갈수록 강해질 것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으로 이런 문제들을 타개해 갈 것인가?

(7절) 시대는 영적으로는 어두워도 나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이 미가의 고민이고 지금 우리의 고민이다. 태양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듯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고, 학교에 가고 싶어도 학교에 갈 수 없고,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예배를 드릴 수 없고, 아니 수많은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압도적인 임재, 우리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변화시키시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이 간절한 마음을 “수천 마리의 숫양” “수만 짐승의 강같은 기름”이라는 물량으로 드리면 하나님이 받아주실까? 아니면 자기 맏아들을,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서 바치던 가나안 종교의 관습처럼 극단적인 헌신을 드리면 반응하실까? 하나님은 절대자가 아니신가! 내가 아무리 양적으로 질적으로 최선을 다한들 그분의 절대적 수준에 이를 수가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하나님이 그런 물량공세에 감동하시는 분이라면,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샤머니즘적인 신앙일 뿐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그동안 이런 감각적인 신앙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이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실제 삶은 어떻게 살든, “하나님 저 세상적으로 성공해야 합니다! 제 자녀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출세해야 합니다! 돈도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도 올라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싶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욕심이 얼마나 강했는가!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축복하셔서 내가 이만큼 하나님께 드린다고, 이만큼 하나님께 봉사한다고!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큰소리 치고 싶어하는 그릇된 신앙이 아니었는가.

그러나 그런 비뚤어진 욕심이 교회 안에서도 들끓어서 내 의견과 다르면 서로 싸워야 하고, 내 사역이 더 중요해서 서로 싸우고, 성공주의와 물질주의와 성적 타락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신부된 교회를 더럽힌 세월이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오늘날 교회가 손가락질과 비난과 편견을 당하는 것에 세상 탓만 할 수 없는 것은 이것을 우리가 자초했기 때문이다. 우리 자신이 세속화로 썩어버렸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영성은 사라지고 정복자의 영성만 남았고 인격적 신앙은 사라지고 자극적인 신앙만 남았기 때문이다.

이런 그릇된 신앙의 사생아로 신천지같은 이단이 태어난 것이다. 어떻게 저런 끔찍한 신앙이 있을 수 있을까! 교주의 탐욕과 거짓과 독재를 떠받드는 사람들의 맹신, 천국과 축복에서 제외될까봐서 거짓말과 술수와 악행을 서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경악하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모습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안에도 있지 않은가. 만약에 교회가 팬데믹으로 교회 문을 닫는 징계를 받으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신천지 이단 사이비들은 나올 수밖에 없다.

하나님, 교회를 교회되게 하옵소서! 성도를 성도되게 하옵소서! 목자가 목자되게 하옵소서! 지금은 전염병 때문에 우리가 교회문을 열지 못했지만, 앞으로 인본주의의 쓰나미가 몰려와서 교회문을 닫게 되는 날이라도 온다면, 그래서 성경을 소지하기만 해도 죄가 되고 공개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기도하지도 못하는 시대가 온다면, 정치적 외교적 사상적 격변이 일어나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때 땅을 치며 가슴을 치며 통곡해도 그때는 이미 늦은 때가 될 것이다!

교회가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영혼들을 살리고, 첨단과 풍요 속에서도 고립과 허무의 벼랑 끝에 매달려있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을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신앙 기복적인 신앙을 이제는 내려놓아야 한다. 오히려 한 영혼 한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십자가라도 지고, 땅끝까지라도 가겠다는 본질적인 신앙이 회복되어야 한다.

(8절) 무엇이 좋을까? 여기서 좋다(히, 토브)는 하나님이 창1장에서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하신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좋은 것, 선한 것, 옳은 것을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와 긍휼과 동행이다.

한 가지씩 보겠다. 첫째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바르게 사는 것이다. 여기서의 공의는 자기 의를 위한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위한 정의다. 오늘날 개인주의와 상대주의가 팽배해지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민감성이 많이 떨어졌다. 나는 세상 일반 사람들에 비하면 나름 괜찮게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대적이고 도덕적인 개념의 자기 의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공의(히브리어, 미슈파트)는 상대적 의가 아니라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판단과 정의를 의미한다. 상황논리에 빠지지 않고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시15:2-3).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선악의 기준을 지키는 사람을 찾으신다. “목사님, 요즘은 세상에서 사업하려면 어쩔 수가 없어요.” “아니요! 시대와 상황과 상관없이 편법과 불법과 탈법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목사님, 요즘은 시대가 달라졌어요.” “아니요! 세상이 성적 탐닉을 오락으로 여겨도 하나님이 그것이 악하다 말씀하시면 그대로 순종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쾌락주의 시대라는 것은 쾌락이 하나님의 진리보다 상위적 개념이 되고 절대 선이 된 것이다. 물질만능 시대라는 것은 물질이 하나님의 진리보다 상위적 개념이 되고 절대 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쾌락이나 물질이라는 만능신이 아니라, 인격적인 전능자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예배자들이여, 바르게 살라! 선악을 분별하라! 하나님은 예배와 악행을 동시에 한 상에 받지 아니하신다!

둘째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긍휼(히브리어, 헤세드)은 자기연민의 차원이 아니라 약자 회복 차원의 긍휼이다. “하나님, 저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자신이 혜택을 받기 위한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 저 사람이 너무 어렵습니다. 저 사람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이웃에게 타인에게 혜택을 베풀기 위한 은혜다.

하나님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보시면 마음이 짠하시고 눈물이 핑 도시고 도와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시대에 외국인노동자들과 버려진 아이들과 미혼모들과 장애인들과 노숙인들과 방황하는 청소년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 사회적 약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이번에 교계에서 “공감소비운동”을 하게 되어 감사하다. 많은 분들이 경기도 어렵고 사업도 어렵고 힘든 때이지만,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긍휼히 여기고, 절망에 빠져서 극단적인 길로 가지 않도록 우리가 붙잡아주는 사람들이 된다면 좋겠다. 이기적인 소비가 아니라 공감을 위한 소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절에는 누군가를 도와주고 싶다가도 그런 마음을 스스로 절제하는 경우들이 많다. ‘내 앞가림이나 하지. 나도 힘든데.’ 과연 그럴까? (요일3:17)“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닫으면”이라는 단어는 자물쇠로 걸어잠근다는 뜻이다. 도와줄 마음을 걸어 잠그지 말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주시면 그건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다. 그 마음을 실천하면 하나님이 최고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 이번에 다락방별로 공감소비운동 준비하며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내게 주시는 마음이 있다면 절제하지 마시고 사랑을 흘려보내라!

정의가 직선이라면 긍휼은 곡선이다. 직선과 곡선이 어찌 함께 가겠는가. 그러나 정의와 긍휼은 하나님 안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왜냐면 그것은 하나님의 두 가지 성품인 사랑과 공의요, 은혜와 진리이기 때문이다. 왜인가? 바르게 사는 것은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가장 바르게 사는 길은 진정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십계명에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전부 바르게 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렇게 바르게 살라고 하는데도 왜 그렇게 사는 것이 어려운가? 그것은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첨단 문명을 누리며 살아도 흉악한 범죄가 급증하는 이유는 사랑이 식으면 공의도 무너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이 식으면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 다른 사람에게 잘해야지 이것이 안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비로소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겸손이라는 전제를 달았을까? 인간은 흠없이 정의롭게 사는 것도 불가능하고, 나 자신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사랑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사랑과 공의를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 따라다니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과연 나에게 기독교 신앙은 액세서리인가 내 몸 속에 녹아들어 있는가? 그래서 피와 살이 되었는가? 필리핀에서 오랜 시간 선교하시던 선교사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가 마을을 위해서 도로도 놓아주고 가난한 분들에게 음식도 나눠주고 학교도 세우고 정말 많은 일들을 했다. 그런데도 마을 사람들은 교회에 오지 않았다. 그가 참담한 마음에 선교사역을 그만둘까 고민하며 마을사람들을 교회에 모아놓고 물었다. “제가 지난 세월 얼마나 이 마을을 위해서 많은 일들을 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왜 교회에 오지 않습니까? 도대체 여러분이 제게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한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Christlikeness(그리스도를 닮은 인격)” 이것이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요즘은 전염병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교회에 못나가는 상황이었지만, 나갈 수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안나가던 신앙은 아니었는가? 일명 가나안 성도라고 한다. 명절에만 만나러 가는 부모님처럼, 주말에만 만나는 부부처럼, 귀가하면 자기 방에 들어가서 안 나오는 자녀들처럼, 하나님과 그런 관계는 아니었는가. 여러분, 우리가 예배드릴 수 있을 때 예배드리고, 찬양할 수 있을 때 찬양하고, 교회에 나올 수 있을 때 나와야 하겠다.

요즘 같이 모두가 집콕하고 있어야 하는 때에 가족의 밑바닥이 드러난다.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 때문에 가정폭력 고발 건수가 증가되었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그저 같이 살 뿐이지 행복한 동행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은 그저 물리적인 집(House)이었지 인격적인 가정(Home)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집에만 오가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가족이 되는 신앙이 되기를!

이상준 목사<br>​​​​​​​1516교회 담임<br>
이상준 목사
1516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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