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복음]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 - 진한 여운을 남기는 그 사람이 곁에...
[영화와 복음] 영화 〈그린 파파야 향기〉 - 진한 여운을 남기는 그 사람이 곁에...
  • 임명진 목사
  • 승인 2024.07.10 10: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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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파파야 향기〉는 1993년 칸 영화제에서 베트남 영화 최초로 황금 카메라상을 받은 작품으로, 트란 안 훙(Tran Anh Hung)을 전 세계에 각인시킨 영화이다. 1950년대 베트남 정취를 물씬 풍기며, 누구라도 한 번쯤 그 세계에 들어가 살고픈 유혹을 받게 만든다. 영화는 특히 오감을 자극한다. 그중에서도 영상과 음악, 음향 효과가 일품이다. 마치 살아 숨 쉬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스토리와 개연성이 결여된 무미건조한 묘사나 단순한 현상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대신, 그저 보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경이로운 나무와 풀, 꽃들의 신비로운 움직임과 각종 풀벌레와 새, 들짐승들이 내는 소리가 시청각을 황홀하게 자극한다. 감각에 호소하지만, 천박한 말초신경의 흥분이 목적은 아니다. 그런 장면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선정적일 수 있는 씬은 극도의 절제미를 가미하여 관객의 상상력에 맡긴다. 그래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다음에도 한동안 그 감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운이 짙게 드리운다.

이제 10살인 가난한 시골 소녀 무이(만 상 루)는 사이공의 어느 부잣집에 하녀로 들어온다. 모든 게 궁금하면서도 낯선 표정으로 조심스레 마을로 들어서는 첫 장면이 무척 신비롭게 묘사된다. 여기에, 베트남 전통악기 연주가 효과음과 배경음악으로 더해지면서 몽환적 분위기에 빠져들게 만든다. 온통 풍류에만 관심을 두고 방랑벽이 있는 주인은 말이 없다. 대신 집안 대소사는 안주인이 책임지는데, 그녀는 몇 년 전 딸을 잃은 슬픔에 잠겨있다. 도무지 현실성이라고는 없는 남편을 대신해 집안을 이끌지만, 불현듯 찾아오는 공허와 외로움에 힘들어하던 그녀는 무이를 딸처럼 여기며 돌봐준다.

그런 무이(트란 누 엔 케)가 스무살이 되던 해, 더 이상 경제적 압박을 견딜 수 없었던 안주인은 그녀를 아들 트렁의 친구 쿠엔(호아 호이 뷰옹)의 집으로 보낸다. 무이는 유복한 가정의 넓은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작곡하며 생활하는 쿠엔의 충실한 몸종으로 살아간다. 처음 마님의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쿠엔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가졌던 무이였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그를 수종 든다. 하지만 곧 방해자가 등장한다. 쿠엔의 약혼자는 적막하고 평화로운 무이의 일상과 주변 환경을 깨뜨린다. 내적 평온의 파괴자다. 하지만 이와는 상관없이 무이는 있는 듯 없는 듯 자기 일을 수행한다.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배경처럼 존재하는 신비로운 무이에게 쿠엔은 조금씩 관심이 가고, 마침내 글을 가르친다. 하나씩 글을 배우고 단어를 익힌 무이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연을 묘사하고 그것은 책이 된다. 글을 배운다는 건, 세상과 사람을 향해 소통하는 눈이 생김을 뜻한다. 그렇게 무이는 쿠엔과 점점 가까워지고, 비록 결혼식은 없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만삭의 무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영화에는 대사가 별로 없다. 오히려 영상과 음악/음향이 가득하다. 종종 등장하는 베트남 특유의 음식은 초밀접 카메라로 포착하여 향기가 느껴지며 손으로 만지듯 촉각마저 자극한다. 특히 쿠엔이 자신의 변화된 심리를 쇼팽의 23번 전주곡에서 24번 전주곡으로 전환하여 연주한 장면은 압권이다. 여기에, 표현할 듯 말 듯, 있는 듯 없는 듯 보이는 무이의 행동과 태도는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쿠엔이 무이에게 빠져들게 된 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젖어 든 분위기와 무이의 존재감 때문이다. 무이의 절제된 행동과 언어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한 힘을 발산한다. 가장 강한 설득은 힘 있는 연설이나 언변이 아닌, 그윽한 눈빛과 스치는 흔적이다. 그리고 이는 관객에게 그대로 전이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신앙도 그렇지 않을까? 요란하고 거창하게 울리는 사람보다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는 바로 그 사람이 끝까지 함께 하는 신앙인이며 동지인 경우가 많다. 드러내는 사랑도 필요하겠지만, 말없이 곁에 있어 주는 그 사랑이 잔잔하면서도 긴 여운을 남긴다. 떠들썩한 제자들보다는 그저 배경으로만 존재했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 부활의 목격자며 증인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우리는 주위를 세심하게 둘러봐야 한다. 시끌벅적한 가짜와 달리 진짜는 때때로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임명진 목사<br>북악하늘교회 담임<br>문화사역 전문기자<br>
임명진 목사
북악하늘교회 담임
문화사역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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