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생은 이해하기보다 받아들이는 것인지 모른다. 고전소설이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해피엔딩이 많지만 그렇다고 전통사회가 그런 사회체제였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조리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사회적 기대가 이러한 구성 체계를 강화시켰을 수 있다. 19C말 미지의 땅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저마다 ‘한국선교’의 소명과 비전을 품고 입국했지만, 사역의 성공과 안전한 삶을 보장받을 수는 없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마펫과 에비슨 등 한국선교의 거장으로 기억되는 선교사도 있지만, 헨리 데이비스, 헤론, 맥캔지, 캔드릭, 제임스 홀 등 짧은 사역에 이어 순교한 선교사도 있다.
호주 장로교회 첫 선교사인 헨리 데이비스는 33살이던 1889년 8월 목사 안수를 받고 누나인 메리 데이비스와 10월 초 조선에 도착한다. 서울 정동 선교부에서 5개월간 한국어 공부를 하고, 이듬해 3월 14일 서울을 출발 수원, 공주, 남원, 하동을 거쳐 20일간 500km를 걸어서 4월 4일 부산에 도착한다. 하지만 도보여행 중 급성폐렴과 천연두에 걸려 이튿날 게일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진다.
데이비스를 부산 복병산 언덕에 안장한 게일은 의료선교사 헤론의 권유로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7월, 정동의 감리회와 장로회 선교사들이 무더위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휴양을 떠나고 환자를 돌보며 남았던 헤론이 과로에 이질로 사망한다. 헤론이 숨지기 직전 게일은 남한산성에 도착한 헤론의 부인 헤리엇 깁슨을 찾아가 소식을 알리고 하늘로 떠나는 헤론의 임종을 지키게 한다.
메리 해이든과 다니엘 기포드는 1889년 가을 미국 북장로회 파송 선교사로 내한한다. 이듬해 봄 헤론이 주관한 조선어 시험에 나란히 통과한 둘은 곧이어 결혼하고 교육과 순회 전도로 사역한다. 콜레라가 창궐한 1895년 여름, 의료봉사로 건강이 악화된 기포드 부부는 이듬해 귀국해 2년간 치료와 요양 후 1898년 다시 내한한다. 조선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는 1900년 4월 시흥과 안성 등을 순회 전도하던 기포드가 이질에 걸려 사망하고, 한 달 후 해이든도 숨을 거둔다.
이국의 땅에서 한해에도 수차례 사랑하는 가족과 동료 선교사를 땅에 묻으며 선교의 길을 개척한 사람들. 몇 개월 혹은 수십 년 인생을 바쳐 한국선교에 헌신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고진감래와 해피엔딩을 위해서 혹은 명예나 자녀의 축복을 위해서? 아니다.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에도 떨리고 흔들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부름의 상을 붙들고 매일 매일을 걸어갔을 것이다. 선교사라는 좁은 문을 택한 이들. 그 좁은 문을 열자 탄탄대로가 아닌 불편하고 위험한 좁은 길이 이어졌다. 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힘은 생명을 살리는 ‘이미와 아직’의 하나님 나라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죄를 짓고도 참회와 자숙의 자리가 아니라 법정과 맘몬의 큰길에서 싸움꾼이 되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그들에게 탄탄대로가 아닌 불편하고 위험하지만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좁은 길, ‘이미와 아직의 하나님 나라’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