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삶을 만드는 믿음
김일성의 외가는 엄청난 기독교 집안이었다고 한다. 외증조부 강량욱, 외조부 강돈욱, 외삼촌 강진석 모두 장로교 목사였고, 특히 외할아버지는 평생 교육자이며 평양 칠골 교회 장로요 목사였다. 그래서 김일성의 어머니는 칠골 교회에 다녔고, 이름은 강신희였으나, 미국 선교사 넬슨 벨이 세례를 주면서 베드로처럼 “반석”으로 살아가라고 세례명을 지어주자 강반석으로 개명했다. 그리고 19살 때 이웃 마을 묘지기 손자요 아들인 김형직과 결혼하여 아들 김성주(거룩한 기둥 같은 인물이 되라는 김일성의 본명)를 낳고 일제 탄압을 피해 가족이 만주로 이주했다.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며 두 아들 철주와 영주를 낳았으나, 큰아들이 14살 둘째는 10살 막내는 5살 때 남편이 31세로 세상을 떴다. 그래서 김성주의 어머니는 만주 부농 조광준과 재혼했지만, 1945년 해방이 되자 남편은 지주로 몰려 중국 공산당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김일성의 아버지 김형직은 23살 때 평양 숭실중학교 동창인 손정도와 같은 마을 출신인 백두산 호랑이로 불린 독립투사요 역시 독실한 예수교 신자 오동진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했는데, 손정도와 오동진, 김형직의 동지애는 기독교 신앙과 독립운동으로 맺어졌다. 14세 소년 김성주가 부친과 사별하자, 오동진이 길림시의 명문 사립 육문 학원에 입학시켜 후원했고, 김성주가 감옥에 갇히자 손정도 목사는 딸을 시켜 옥바라지했으며,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에 오동진과 손정도 목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구구절절이 기록해 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성주는 항일무장 투쟁 시절에 가명으로 김일성(金日成 ‘태양처럼 빛나는 인물’의 의미)으로 개명하여 활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일성이 김성주로 살았던 때는 누가 보아도 애국 조선 청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삼촌(김형록, 김형곤) 모두 항일 독립운동했던 집안에다가, 외가의 목사 가문, 특히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 시절은 기독교 신앙으로 무장한 항일운동파 아버지의 동지들은 사상적인 자양분이 되어 김성주는 항일 유격대로 만주에서 활동했고, 이걸 가지고 명예욕을 채우려고 훗날 날조하여 북한 종신 통치자로 군림하다가 세기적인 독재자 시조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순교신앙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목회자들과 거리를 두던 목사들이 6.25 때 교회를 버리고 남한으로 줄행랑을 치더니,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리화함을 보고, 애국 조선 청년이었던 김일성은 한없이 역겨워 남한의 목사들과 교회를 아예 가짜들로 치부하며 무시했을 거라는 시각도 있다. ‘실제 삶을 만드는 믿음’이 그래서 중요하다.
“그 제사장들은 내 율법을 범하였으며 나의 성물을 더럽혔으며 거룩함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였으며 부정함과 정한 것을 사람이 구별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그의 눈을 가리어 나의 안식일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겔 22:26)
믿음과 행함
윌리엄 부스라는 청년이 전도에 미쳐 지내다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더니, 진단한 의사가 중병이라며 심각하게 충고했다.
“이런 몸을 그대로 계속 전도 생활하면 1년도 못 버팁니다.”
부스는 집에 와서 깊이 생각한 후에, 결국 죽음을 각오하고 계속 전도 생활을 해가기로 결단했다. 그는 심각한 병을 이겨내고 끝내 구세군을 창설했으며, 84세까지 살았고, 이런 고백도 남겼다고 한다.
“내가 젊었을 때 의사가 나를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 의사의 충고를 포기하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로 예배로 충심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저를 지켜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실제 위력이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믿음과 삶을 냉정하고 엄격하게 점검해보자. 어떻게 하면 윌리엄 부스처럼 믿음의 길로 들어설 수 있을까?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암살하려고, 여자 자객이 경비병처럼 남장하고 궁에 잠입했다가 암살 작전에 실패하고 체포되었다. 그래서 여왕이 친히 재판석에 앉아 심문하는데, 그 자객이 이렇게 호소했다.
“내가 속아서 이런 막중한 죄에 가담했으니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왕이 “그래, 내가 너에게 은총을 베풀어 준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하겠느냐?”라고 물어보았다. 한 마디의 대답으로 생명이 좌우되는 순간, 암살자는 이렇게 답했다.
“조건이 있다면 은총이 아닙니다.”
여왕은 한참 침묵하더니 그 자객을 아무 조건도 없이 석방했다. 그 사실에 대하여 영국 왕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여왕에게 그녀만큼 신실하게 헌신한 여종은 없었다.”
석방된 자객은 여왕의 종으로 살았고, 성실의 모범이 되었다. 진정한 은총을 알고 누리며 “행하는 자”로 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