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정치사상가’이자, ‘자유주의 정치’에 대한 비판자인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20세기 후반에는 오히려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를 뚫고 나가려는 좌파의 정치적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특히 초기 저작인 『로마 가톨릭교와 정치적 형식』(두번째테제, 2024)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특성을 중심으로 자유주의 정치를 비판합니다. 곧, ‘의회주의의 대의 정치’와 ‘가톨릭교회의 대표(교황) 정치’를 비교하며 후자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지금 대한민국 의회(대의 민주주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아니, 하지 못하나요?). 사실, 의회주의는 ‘투표하는 개인’을 단순히 대리하는 이들(국회의원)을 뽑는 데 머뭅니다. 그리고 의회(국회)는 대리자들의 모임입니다. 익명성의 지배 아래, 인격 없는 세력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표가 된 순간, 대리자가 아니라, 권력에 줄을 서죠?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의 민주주의가 우민(愚民)주의가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치신학』에서 슈미트는 이러한 의회주의, 곧 자유주의 정치의 한계를 이렇게 비판합니다. “자유주의 정치는 모든 문제, 심지어 형이상학적 진리까지도 토론과 협상으로 해소하려는 사고방식이며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끝없이 대화만 하는 정치이다.”
국회가 법안을 만들면 대통령은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하며 그들만의 끝없는 대화를 합니다. 그리고 갖은 특권과 권력은 양자 모두 누립니다. 따라서 슈미트는 이러한 ‘어정쩡한 의회주의’를 ‘가톨릭교회의 결단주의’와 대조시킵니다. 가톨릭교회는 시종일관 대표성이 위(교황-추기경-주교)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스리고 지배하며 승리하는 그리스도를 대표”하는 이가 교황이기 때문입니다(아, 교황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가톨릭교회는 교황이라는 분명한 인격적 권위와 엄격한 위계질서 속에 그리스도의 지배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가톨릭교회의 정치 형식에 관해 슈미트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먼저, 가톨릭교회는 추기경단이라는 ‘귀족제 요소’와 추기경단이 선출한 교황의 지배라는 ‘전제 군주제’ 요소를 동시에 지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교황 역시도 출신이 미천한 사람 중에서 뽑힐 수 있기데 ‘민주제 요소’도 지닙니다. 이러한 세 가지 정치적 성격의 통합 속에서 교회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적 조직체로서 가톨릭 세계를 다스립니다. 그리고 교화과 가톨릭교회는 인간 공동체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된 신으로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대표합니다.
대단하지 않나요? 원리와 형식은 옳았지만, 그것을 집행한 인간의 문제였습니다(루터의 종교개혁에 공감하는 개신교인으로서). 그렇다면 슈미트가 이러한 생각을 한 계기는 무엇일까요? 그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년, 독일) 체제가 좌우익 극단주의의 위협에 끝없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슈미트는 허약한 바이마르 체제를 지탱하기 위해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형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슈미트는 나치 집권 초기, 히틀러를 지지했습니다(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환멸로 끝났죠? 슈미트는 “나치 이념에 충실하지 않다.”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지금, 선한 히틀러는 누구인가요? 가톨릭의 교황 역할을 할 종교 지도자는 누구인가요?, 마냥, 언제 올지 모르는 메시아(예수님의 재림)만 낮이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기다려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