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_김진호 목사(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 본지는 지난호에 이어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의 제2차 기사연 에큐포럼 ‘한국교회 보수화와 정치참여’에 실린 김진호 목사의 발제를 2회에 걸쳐 발췌하여 싣는다._편집부
‘아스팔트 극우’ 현상과는 다른 새로운 극우 현상도 이 시기에 나타났다. 이 새로운 극우주의 현상이 물결치는 대표적인 장은 ‘온라인공간’이었다. 해서 나는 이를 ‘온라인극우’라고 부르고자 한다. 리더도, 중심 가치도 없는, ‘위반의 정치’(politics of transgression)로 점철된 담론장에서 조롱과 증오가 물결친다. 그런 곳에서 일어나는 극우주의 현상을 ‘온라인극우’라고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는 개체화된 개인들이 키득거리며 혐오적 대상(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향해 조롱과 야유를 퍼붓는다. 미디어 비평가인 박건일은 이런 극우행동의 동기를 ‘주목경쟁’(attention struggle)이라고 말하였다. 즉 “이념을 위해 주목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주목을 위해 이념을 추구하는” 것이 온라인극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한데 이런 주목경쟁의 사회심리는 신자유주의적 무한경쟁이 일으킨 열패감 혹은 ‘예감된’ 열패감과 관련이 있다. 이런 과도한 스트레스가 초래할 피로증후군에서 회피하려는 무의식적 행위의 하나가 바로 주목경쟁 게임이라는 것이다. 지나치게 과장된 언행이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면 자기 효능감을 발견함으로써 쾌락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대는 민주주의적 질서가 매우 강력하게 사회를 이끌고 있는 시대였다. 아직 잔재가 남아 있는 권위주의 시대의 폭력과 부조리의 청산은 이 시대 민주주의 담론의 중요한 과제였다. 이런 규범적 질서를 학습하며 성장한 청년들이 그 규범적 가치를 위반하는 언행을 벌였다. 당연히 그것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즉 그들의 위반은 주목경쟁에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온라인극우 담론은 활발해졌다.
개신교계의 온라인극우는 이와 겹치면서도 조금은 다르다. 이런 주장을 편 개신교 기관들은 자신의 활동을 ‘미디어선교’라고 명명했다. 이 표현은 주목경쟁이라는 용어와는 늬앙스가 다른, 곧 가치 지향적 활동의 함의가 들어 있다. 즉 미디어선교 활동가들은 주목받기 위해 민주주의적 가치를 위반하는 언행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그런 반민주적 신념 때문에 위반을 하고, 그런 것으로 인해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적 요소가 더 강한 미디어선교를 벌이는 기관들도 생겨났다. 이 단체들을 중심으로 미디어선교라는 표현보다는 ‘플렛폼선교’라는 표현이 더 선호되었다. 플렛폼은 활동가들에 대한 조직적 이념교육 같은 것이 약화된다. 반면 주목경쟁이 훨씬 더 게임처럼 벌어진다. 그 플렛폼 안에서 반민주적 언행을 경쟁적으로 벌임으로써 사회적 논란을 한층 더 증폭시키고 더 만족스러운 자기효능감을 확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플렛폼으로서의 온라인 공간이 더 활성화되면서, 주목경쟁은 막대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발생시켰다. 하여 증오를 생산하고 유통하면서 자기효능감을 극대화하는 온라인극우는 ‘혐오경제’(economics of hate)라는 자본의 축적시스템(capital accumulation system)을 발견하게 되었다. 혐오 자체가 초과이윤을 발생시키는 자본 축적 행위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플렛폼선교의 특징인 것이다. ‘선교’라는 용어는 그렇게 축적된 혐오경제의 추악함을 세탁하는 종교적 담론의 장치다. 이런 온라인극우의 탄생이 실현된 시기가 바로 21세기 한국사회이며, 강남권의 신흥대형교회 현상은 이런 변화의 추동자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세계화의 첨병 역할을 함으로써 성공을 이룩한 21세기형 대형교회의 중심 세력은 세계화에 종말을 도모하는 냉전체제와 극우주의 운동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하다. 하지만 그들의 물적, 상징적 자본의 과점 현상은 실패 혹은 예감된 실패의 나락에 빠지거나 그럴 위기에 놓인 이들의 열패감을 생산하며, 그것은 2010년대에 극우주의가 활성화되는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극우주의는 세계화와 쌍생아인 플렛폼 중심의 온라인 공론장에서 자본축적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
현재의 국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 세계적으로 위험 수위를 넘나들고 있는 극우주의 현상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무한경쟁체제는 ‘실패한 자’ 혹은 ‘실패의 예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을 포용할 수 없는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배제의 장으로 더 적나라하게 내몰리고 있는 이들 사이에서 극우주의가 자라나고 있다.
교회는 이런 비대칭적으로 양극화된 사회 형성에 가장 중요한 추동세력의 하나다. 특히 21세기 어간 이후 대형교회 대열에 들어선 교회들이 그렇다. 이런 교회들 사이에서 이른바 ‘풍요의 신앙’이 발전했다. 한데 이런 신앙논리에 따르면 ‘풍요’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전혀 아니다. 풍요를 위한 비용이 만만치 않다. 사회적 연줄망은 그런 비용이 풍요라는 성과로 전환되는 데 매우 유효한 자원이다.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이들 대형교회적 규율체계에 자발적으로 순응하게 하는 내적 동력이다. 그리고 이렇게 ‘잘 규율된 신자’를 더 많이 보유한 교회일수록 더욱 더 성공을 구가하는 데 유리했다. 이런 신자유주의적 순환고리가 21세기적 대형교회 현상을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대형교회 현상은 성공하지 못하여 열패감에 빠져 있는 교회들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즉 ‘대형교회 없는 대형교회 현상’이 널리 메아리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메아리는 아름다운 소리처럼 변조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부드러운 배제와 폭력’이 소음처럼 깔리고 있다. 그런 은은한 소음의 현장에는 ‘호혜적인 것이 유실된 야만’이 꿈틀대고 있었다. 바로 여기에 극우주의가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 성공한 교회들과 일부 작은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들 사이에서 호혜적 신앙을 강조하는 담론이 제기되었다. 물론 그 구체적 담화 내용은 다소 다르지만, 호혜적 신앙의 요청이라는 점에서 여러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경제학자 칼 폴라니에 의하면, 인류의 역사는 경쟁하는 타자를 제압하고 파괴함으로써 성공을 이룩한다는 약탈경제로만 작동해온 것이 아니다. 서로 상호적이고 호혜적인 방식의 상생의 경제도 작동함으로써 세계는 존속해 왔다. 그는 이런 호혜적인 상생의 경제를 ‘사회적 경제’라고 명명했다. 그런 사회적 경제를 강조하는 체제로의 전환 혹은 보완을 추구하는 신앙운동이 사회교체를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치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과제다.
한편 오늘날 극우주의가 위험스럽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할 때, 극우주의와 친화적일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오래된 관행이 있다는 점에 대한 비판적 점검이 필요하다. 개신교를 포함한 그리스도교 신앙은 오랫동안 ‘장벽’을 쌓으면서 발전해 온 역사를 갖고 있다. 장벽은 타자와 우리를 구별하는 무수한 장치들을 통해서 작동된다. 그런 장벽을 허물어내는 일은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성찰적 과제다.
이 점에서 최근 한국교회의 행보가 문제적이다. 많은 교회와 성직자들, 그리고 신자들이 곳곳에서 신앙적 구별짓기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여기에는 ‘영성’이라는 종교성의 내면적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다. 성서에서 영은 몸의 장벽, 시간의 장벽, 공간의 장벽, 인종의 장벽, 성의 장벽 등, 무수한 벽을 무효화하는 신앙 코드로서 발견된 것인데, 근대적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도리어 장벽 쌓기의 도구로 활용해왔다. 그것은 전통적 장벽을 허물고 낯선 것들과 재조합을 모색하는 융합의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모습이다. 해서 그리스도교는 점점 더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더욱이 그런 낡은 신앙의 고수 및 강화 현상이 극우주의와 결합되곤 한다. 적을 지목하고 배척하며 공격하는 태도는 극우주의와 닮았기 때문이다. 하여 극우주의를 극복하는 그리스도교 정치가 더욱 필요하다. 특히 성소수자나 이민자 등, 교회가 광적으로 환대 거부를 주장해 온 존재들에게 교회는 문을 열고 마음을 여는 정치가 요청된다.
주목할 것은 이런 타자 환대의 정치를 무한히 확장하려는 신학적 담론도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 미생물, 나아가 무생물로까지 확대되는 ‘살림의 정치’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나 기후위기 사태 같은 재앙을 통해 ‘우리’의 범주를 최대한 넓히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생존 가능성까지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이런 살림의 정치는 절박하게 다가왔다. 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치는 모든 존재들과 상생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우리 문화 속에 내재된 죽임의 관계를 극복하려는 ‘살림의 정치’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온라인극우 문제와 대면할 필요가 있다. 온라인극우는 온라인 공간이 한층 강화시킨 ‘주목경쟁’에 ‘혐오’라는 코드를 연결시켰다. 미디어선교 혹은 플렛폼선교라는 이름으로 혐오의 정치가 추구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온라인의 세계는 이렇게 주목경쟁을 혐오로만 코드화되도록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기억전쟁이다. 혐오의 자리에 다른 기억을 연결시킬 때도 주목경쟁에서 성공을 거두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다른 기억은 때로 정치의 내용을 크게 바꾸어낸다. 그 한 예를 우리는 BTS 현상에서 볼 수 있다. 이 보이 그룹은, 자본집약적인 문화산업의 기회를 적극 활용하면서도, 호혜적이고 상생적인 방식의 대중음악을 온라인공간에서 구사했다. 그들을 환호하는 대중은 타자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하고 마음과 물질을 나누는 일에 참여했다. 그럼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나아가 그것은 엄청난 자본효과를 불러왔다. 혐오의 자리에 호혜가 들어갈 수 있는 미디어선교와 플렛폼선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의 장벽을 넘어서서 벌이는 선교는 정치가 되며, 그런 정치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절박하게 요청되는 선교가 된다.